[인터뷰] 한동근 수원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부인 임이화 씨

 
 
'이석기 내란음모사건' 구속자 중 한 명인 수원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한동근 이사장의 부인 임이화(40) 씨는 인터뷰를 하기 전에는 제법 밝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인터뷰가 시작되자 금세 두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인터뷰 내내 그랬다.

인터뷰는 6일 오후 임 씨가 살고 있는 수원시 한 찻집에서 진행됐다. 오는 11일 항소심 선고공판을 5일 앞두고였다.

이석기내란음모사건이 지난해 8월 28일 터졌으니 벌써 1년 가까이 남편을 빼앗긴 셈이다. 사건이 터지자 임 씨는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가족대책위 활동을 하며 남편의 구명운동에 발벗고 나섰다. 만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만났다. 머나먼 로마까지 날아가 교황도 만났다. 4대 종단 지도자들도 탄원에 함께했다.

임 씨는 지난 2000년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결혼한 지 9년 만에 어렵게 얻은 7살짜리 아들이 하나 있다.

- 남편 한동근, 수원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한동근은 어떤 사람인가?

 
 

남편은 다같이 잘살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자신을 바쳐 활동한 사람이다. 수원 최초로 지역의료사업을 위해 수원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을 만들었다.

마을이 건강해야 나도 건강하다고 늘 얘기했다. 건강 불평등을 해소하고 건강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헌신해 왔다. 재판 과정에서도 지금까지 무슨 일을 해왔는지 얘기했다.

솔직히 이런 말 하면 또 ‘그것 봐. 그러니 간첩이지, 종북이지’ 말할까봐 고민이다. 남편은 통일된 평화로운 세상에서 사는 걸 꿈꾸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뛰었던 사람이다. 지금은 통합진보당에서 맡고 있는 직책이 없다. 하지만 민주노동당 시절 당에서 활동할 때 매년 여름마다 통일노래한마당을 했다. 영통구에서 준비위원장을 맡아 직접 통일행사를 기획하고 주관하고 아주 성대하게 했다.

남편은 폭력을 되게 싫어했다. 부부싸움할 때도 물건을 던지는 건 저였지 남편은 절대로 그런 행위 자체를 용서하지 않는다. 통일노래한마당 할 때도 아이들 장난감 총이나 칼, 탱크 같은 무기를 화분으로 바꾸어 주는 행사를 했다. 아들한테 장난감 물총 한번 사준 적이 없다.

국정원 직원들이 내민 영장에 내란음모니, 총과 무기를 가지고 정권을 전복하려고 했다느니 하는데 집에서 총 한 자루 나온 게 없다. 아들을 키우지만 장난감 총 한 자루 없다.

- 이 사건이 터지고 나서 남편에 대해 새로운 사실도 많이 알았을 것 같다.

남편은 너무 바쁜 사람이었다. 아이랑 축구도 좀 하고 놀아줬으면 좋겠다고 맨날 잔소리를 해댔다. 축구공을 하나 사 놓긴 했는데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다. 뭐 때문에 바쁘냐고 잔소리를 많이 했다.

재판 과정에서 남편이 뭘 하고 살았는지 재판부에 제출할 증거가 필요해서 조사를 해봤다. 정말 많은 일을 했더라.

수원에 의료생협을 처음으로 만들고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면서 수원에 생협 네트워크를 만드는데 앞장섰다. 나아가 경기도 보건의료분과 활동을 했다. 의료공동체 기반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의료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만들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다. ‘오늘은 누구를 만났는데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났다. 의료계 인물인데 앞으로 지역에서 같이 활동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얘기를 종종 했다.

가족대책위 활동을 하면서 참 많은 분들을 만나고 다녔는데, 어떤 한 분이 ‘앞으로 우리 사회의 대안은 공동체다. 사회적 공동체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더라. 그때 ‘아, 남편이 하던 일이 의료공동체를 위한 활동이었구나!’ 하고 깨달았다.

가족대책위에서 활동하는 부인들도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우리 남편들이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었구나! 지금은 탄압을 받고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구나 보편적으로 고민하는 가치가 되겠구나!’ 하고 말이다.

- 가족대책위가 그동안 참 많은 활동을 해왔다.

처음에는 사건 터지고 솔직히 우리 편이 별로 없었다. 소위 진보적이라는 곳에서조차 알면서도 피하거나, 알려고 하지도 않거나, 알면서도 배척하거나 했다.

‘너네는 원래 그런 애들이야’, 그런 식으로 싸잡아 비난했다. 먼저 우리 얘기를 들어줄 만한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이 사건에 대한 진실을 얘기했다. 구속된 사람들이 훌륭한 일을 해왔던 사람들이고, 한 가정의 가장이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에 대해 한 사람 한 사람 만나서 얘기했다. 그렇게 활동하면서 마음들을 모아나갔다.

정치권도 만났다. 새정치민주연합 정치인들을 만났는데, 조금 숨어있다고 해야 하나? 많이 위축돼 있더라. 알면서도 ‘힘이 못 돼서 미안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새정치민주연합 정치인들은 만날 만한 사람들은 다 만난 것 같다. 안철수부터 문재인까지 말이다.

어떻게든 도와주려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안철수처럼 탄원서조차 받지 않는 정치인도 있었다. 보통 탄원서에 싸인은 안 해주더라도 탄원서는 받는데 안철수는 우리가 내민 탄원서를 비서가 받게 하고 직접 안 받더라. 다른 국회의원들은 ‘법이 다 알아서 하는 거 아니냐. 굳이 뭐 하러 다니냐’ 하며 싸인은 안 해줘도 탄원서만큼은 직접 받았다. ‘안철수는 참 인간성이 없구나’ 생각했다.

처음에는 인권단체에서도 나몰라라 했다가 인권보고대회가 열리고 나서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압수수색 과정에서 인권에 반하는 사례가 많았다. 인권재단 사람의 박래군 상임이사 같은 경우는 처음부터 같이 했지만 말이다. 국제 엠네스티에도 알렸다. 1심 재판 과정에서 동아시아 엠네스티 활동가가 오기도 했다.

종교계 인사들도 다 만났다. 4대 종단 지도자들을 비롯해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다 만났다.

제일 먼저 손을 잡아 준 곳은 기독교였다. KNCC 정진우 목사님이 저희 손도 잡아주시고 바람막이도 돼 주셨다. 어디서도 만나주지 않고 받아주지 않을 때 ‘갈 때 없으면 이곳 기독교회관으로 와라. 큰 힘은 아니지만 와라’, 그곳에서 10일 동안 머물면서 탄원서를 받으러 다녔다.

저희한테 등불이 돼 주셨다. 정말 감사드린다. 친정아버지 같았다. 어디를 가나 저희를 데리고 다니면서 ‘갈 곳이 없어서 기독교회관 찾아왔다. 탄원서 받고 있는데 써 줘라’ 하고 말씀해 주셨다. 어디 어디를 찾아가라고 소개도 시켜주셨다. 저희가 힘들 때 매일 기도해 주셨다. 되게 큰 힘과 위로가 돼 주셨다.

어떤 한 분은 ‘가장 탄압받고 가장 억울하고 힘든 분 곁에 서 있는 게 종교의 사명이다’라고 하시더라. 권력에 의해 탄압받는 사람들이 가장 억울하고 힘들기 때문에 종교가 권력에 반하는 입장에 설 수 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고 하시더라. 종교계 분들을 만나면서 눈물도 많이 흘렸다. 그분들이 주신 위로가 아주 컸다.

교황님 얘기를 들었다. 그분이라면 모른 척하지 않을 거다. 무조건 만나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만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더라. 일단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수원교구 이영훈 주교님이 편지를 써 주셨다.

로마까지 약속을 잡고 간 것도 아니었다. 처음엔 교황님이 집전하는 새벽 미사 때 만날 수 있다고 해서 기대를 했는데 갑자기 일정이 취소가 됐다. 이제 어떻게 하나? 들리는 소문에 광장에서 알현 미사를 하는데 근처에서라도 교황님을 볼 수 있다고 하더라.

정말 수만명이 모여 있었다. 가족대책위 부인들 중 천주교 신자 2명이 ‘남편을 도와주세요’ 라고 쓴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며 계속 ‘남편을 도와주세요’라고 외쳤다. 교황님이 손을 잡아주시고 강복도 해주셨다. 준비해 간 편지도 교황님이 직접 받아주셨다.

기적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냥 일어나는 기적은 없는 것 같다. 많은 주교님들이 도와주셨고 그런 힘들이 모아져서 일어난 기적인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정말 감사하다.

- 가족대책위 활동에서 가장 큰 성과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정치, 문화, 예술, 종교, 교육 등 각계각층 모든 인사들을 만났다. 가족대책위가 마음을 모아내는데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우리가 절실하니까 이곳저곳 받아주든 아니든 문을 두드렸다. 열어주지 않더라도 할 수 있는 만큼 계속 문을 두드리니 문을 열어주시더라.

일단 이 사건에 대해 잘은 몰라도 ‘얼마나 힘들면, 억울하면 그러겠냐. 힘내라’고 말을 해줬다. ‘이 사람들이 정말 억울하구나, 잘못 됐구나’ 하는 생각들을 모아냈다.

개인적으론, 박근혜 정권의 독재로 비상식이 상식처럼 되어가는 세상에 희망이 있을까, 너무 암담하고 너무 견고하고 깨뜨릴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여러 곳에 열심히 민주화를 위해 싸워온 사람들이 많이 계시더라. 다양한 모습으로 다양한 곳에 계시더라. 우리 사회에 이런 분들이 있는 한 시간 문제라는 생각이 들더라. 지금의 암울한 독재도 시간이 문제가 될 뿐이다. 그것이 저한테는 가장 큰 보람이었다. 그런 분들을 만나서 얘기를 들으면서 나름 희망을 찾을 수 있었던 것 같다.

- 가슴 아픈 순간도 많았을 것이다. 어떤 때에 가장 힘들었나?

모르는 사람들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간첩 아니냐? 내란음모 맞지 않냐? 증거도 차고 넘치는 것 아니냐?’ 그럴 때 암담하고 막 답답했다.

가장 분하고 억울한 것은 국정원이나 박근혜 정권일 수도 있으나 언론이 가장 원망스럽다. 특히 한국일보 기자들이.... 지금도 한국일보 기자 7명의 사진과 명단을 가지고 다닌다. 언론이 팩트 확인도 안하고 국정원이 내준 녹취록을 마음대로 퍼트렸다. 그리곤 기자상도 2번이나 받았다.

그것은 펜대를 심장에 꽂는 행위다. 아직까지 빼지도 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웃으며 살아간다는 걸 생각하면 잠이 안 온다.

재판 과정에서 녹취록이 잘못됐다는 것이 다 드러났다. 그 기자들이 모를 거라 생각 안 한다. 단군 이래 단일사건에 대해 최대 많은 엄청난 보도를 했다. 정정보도 하나 없다. 왜곡 보도의 100분의 1, 1,000분의 1도 보도를 안 하고 있다. 사람을 죽이는 보도 태도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한다. 처벌을 받아야 한다.

인권보고대회 때 한 정신과 의사가 인혁당 사건 등을 포함해 수많은 조작사건 피해자들의 고통이 여전히 치유가 안되고 있다고 하더라. 치유 방법은 당사자가 와서 사과해야 하는데 그것이 안되다보니 그 어느 누구도 치유가 안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전부 말도 안된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 무죄로 밝혀질 거라고 한다. 그때까지 참으면 된다고 하기도 한다. 문제가 밝혀지고 명예가 회복될 거라고 한다. 하지만 나중에 진실이 밝혀진다고 해도 상처는 그대로 남아 있는 거다. 그 상처를 치유할 주체는 언론이고 한국일보 기자들이다. 언론인이라면 반드시 언젠가 와서 무릎 꿇고 사죄를 하든, 자신들이 지은 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언론인이라면....

- 항소심 선고공판이 며칠 남지 않았다. 어떻게 될 것 같나?

사람들은 대체로 잘 될 것이라고 한다. 가족들이 다시 만날 것이라 한다.

하지만 잘 아는 분들은 이런 정권 하에서, 말도 안되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는 정권 하에서 상식적인 기대를 한다는 건 말도 안된다고 한다. 오히려 상처가 더 클지도 모르니 아예 모질게 생각하고 기대도 하지 말라고 한다.

1심 선고 때도, 아무리 법이 권력의 편에 선다 한들 재판과정에서 진실이 드러난 마당에 자신의 양심을 찍는 판결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법과 인간의 양심에 반하는 판결을 했다.

지금 법이라는 게 솔직히 양심과 정의와는 거리가 먼 거구나 생각을 하고 있다. 어떤 기대도 하지 말아야 되겠다고.... 그래도 너무 억울하다. 아무리 판단을 해도 다르게 볼 수가 없는데....

머릿속 생각이 위험해서 격리를 시켜야 한다고, 내란은 말로 하는 거라고 말도 안되는 판결을 할까봐.... 그래도 기대를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다.

1년이라는 시간이 짧지 않더라. 솔직히 판결이 납득할 수 있으면, 교통범칙금을 받아도 납득할 수 있으면 쌩돈을 내도 덜 억울하지 않냐? 1년 동안 아무리 생각을 해도, 판결문을 아무리 읽어봐도 뭐 때문에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단 한 줄도 알 수가 없다. 이것이 너무 힘들고 억울하다.

1심에서 유죄를 선고한 김정운 판사에게 쫓아가서 물어보고 싶다. 1년도 고통스럽고 힘들었지만, 나를 이해만 시켜주면, 앞으로 더 많은 시간도 당연히 받아야 할 고통이라고 생각하고 받겠다. 이런 생각도 든다.

-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데자뷰다.

정말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인혁당 사건 미망인도 만나고 수많은 간첩 사건 피해자도 만났다. 간첩으로 몰렸다 무죄 받은 분도 만났다.

한결같이, 이번 사건이 과거에 끝났어야 될 일들이, 아직도 똑같이 벌어지는 현실이 너무 통탄스럽다고 하더라.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두 번이나 옥고를 치른 이해동 목사님 사모님을 뵙기도 했다. 지금도 관련된 분들이 모임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 모임에서 ‘그동안 민주화를 위해 많은 고통도 받고 모든 걸 바치고 험난하게 살아왔는데, 이 사건을 보고 참 허무하다’는 얘기가 나왔다고 하시더라. 그러면서 우리 한테도 ‘미안하다’고 말씀하셨다. ‘일어나지 말아야 할 조작사건이 일어나서, 전 세대로서 이 나라 민주화를 다 이루지 못해 젊은 당신들이 또 고초를 겪는 것이, 이 상황이 너무나 미안하다’고 하시더라.

우리가 마지막이 돼야 한다. 우리 후손들에게 ‘열심히 싸우지 못해, 최선을 다하지 못해 미안하다’, 이런 말을 이제는 안 하게 됐으면 좋겠다.

이제는 말도 안되는 종북 논쟁을 끝내고 종북 프레임을 깨서, ‘종북’이라는 말만 해도 창피해 말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우리의 희생이 그런 씨앗이 됐으면 좋겠다. 그래야 희생이 보람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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